미국여행기⑧필라델피아(Philadelphia)
펜실베니아에서 고 서재필 박사를 만났습니다. 펜실베니아는 미국의 태반이 묻힌 곳이지죠. 이 곳에서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영국의 압제에 대항하기로 결의했고 독립선언서와 아메리카합중국 헌법을 기초했습니다.
펜실베니아에서 고 서재필 박사를 만났습니다.
펜실베니아는 미국의 태반이 묻힌 곳이지죠.
이 곳에서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
영국의 압제에 대항하기로 결의했고
독립선언서와 아메리카합중국 헌법을 기초했습니다.
'Liberty Bell' 도 이 곳에 전시돼 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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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종은 영국이 펜실베니아 식민지 지정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
설치한 것인데 아이러니칼하게도 미국 독립선언 당시 타종되고
이후에는 '자유의 종'으로 부르게됐다는군요.
종에 균열이 생겨서 1846년 이후론 종을 치지않는다고 합니다.
아래 건물은 어디서 본 듯 하지 않습니까?
영화 'National Treasure'에서 니콜라스 케이지가
특수 안경을 찾아낸 인디펜던스 홀입니다.
이 안경을 써야 독립선언문 뒷 면에 숨겨진
보물 지도가 보이지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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투어를 신청하면
홀 내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.
투어는 아래 방에서 간단한 설명을 듣고 시작됩니다.
가이드가 안내에 앞서 관광객들의 출신 주를 물어보는데
저의 가족이 가장 먼 곳인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 때문에
가장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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건물 안에
헌법이 기초된 방이 있습니다.
각 주 대표들이 아래 책상들에 앉아서
미국의 뼈대를 설계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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미국 대법원은 1935년에야
제 건물을 갖게됐는데
그 전에는 이 곳 저 곳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신세였다는군요.
이 곳은 초창기 대법원 법정.
의자 수를 보니
당시에는 대법원 판사가 6명이었네요.
지금은 9명으로 늘었지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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펜실베니아 방문 길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습니다.
펜실베니아 미디아시에 있는
서재필 박사 기념관입니다.
이 곳은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한 서 박사가
1925년부터 51년까지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염원하면서
근거지로 삼고 살았던 집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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저는 한참을 헤맨 끝에 폐관 시간인 오후 5시가 다 돼서야 도착했습니다.
기념관은 인근에 거주하는 한국 유학생이 자원 봉사 형식으로
관리하고 있더군요.
기념관 내부의 모습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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유학생은 폐관 시간이 지나고도 오랫동안 저의 가족을 안내했습니다.
감회가 새롭더군요.
국사 시간에 입시용으로 암기했던 서재필이라는 인물을
이역 만리 타국에서 가슴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.
유학생의 설명에 따르면,
이 저택은 서 박사가 유명을 달리한 이후 첫째 딸이 머물러 살았으나
첫째 딸이 숨진 이후 미국인에게 넘어갈 뻔 한 것을 필라델피아 교민들이
모금 운동을 벌여 인수했다고 합니다.
갑신정변 당시 서 박사의 부인과 자녀들은 모두 참살당하고
서 박사는 미국 망명 시절 미국 여성과 결혼해
딸 둘을 얻습니다.
둘째 딸은 독신으로 남고 첫째 딸은 결혼해 서 박사의 혈육을 남기나
이 혈육은 연락이 두절됐다는 군요.
지금과 같은 기념관으로 개축된 것은 1990년 11월 24일로
서재필 기념재단(1-215-224-2000)의 역할이 컸습니다.
기념관에는 주로 미국 교민들이 방문하고 있을 뿐 한국 관광객의 발길은
뜸하다고 합니다.
정치인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 시절에 한 차례,
대통령 퇴임 후 한 차례 방문했습니다. 이인제 전 민주당 고문의 이름도 보이더군요.
방명록에는 또 민족사관고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방문한 기록이 있어 반가웠습니다.
기념관에 소개된 서 박사의 행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.
'갑신 정변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미국으로 망명,
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이자 미국 의사가 됐다.
3.1 운동 직후 제1차 한인회의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,
한국 독립의 열망을 전 세계에 알리고
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설립해 조직적인 선전활동을 벌였다.
1895년 10년만에 한국에 돌아온 서재필은
1898년 5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
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등 계몽운동에 헌신했다.
독립협회, 독립문, 독립관을 설립해 자주독립 사상과
민주 민권 사상 고취에 힘썼다.
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워싱턴 군축회의 등에 참가,
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각국 대표들에게 인식시키는 등
외교적 독립운동을 전개했다.
1947년 7월 과도정부 특별 의정관 자격으로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
정치 활동 보다는 국민 계몽운동에 헌신했으며
미소 냉전으로 분단이 고착화해가는 상황에서
한민족 통일과 민주적 근대국가 건설에 매진했다.
그 와중에 서재필 초대 대통령 추대 움직임이 일자
정치적 야심이 없음을 공표하고
한국이 통일되어 잘 살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긴채
남한 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된 직후인
48년 9월 한국을 떠났다'
조선의 근대화에 목숨을 걸었던
청년 서재필이 꿈꾸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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'합하면 조선이 살테고
만일 나뉘면 조선이 없어질테니
조선이 없으면
남방사람도 없어지는 것이고
북방사람도 없어지는 것이니
근일 죽을 일을 할 묘리가 있겠습니까.
살 도리들을 하시오'
말년의 서 박사가 분열된 조국을 향해
유언처럼 남긴 말이라고 합니다.



